옷, 개인 그리고 패션테크 스타트업

얼마전 김정운 작가의 Editology를 읽었을때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공간의 형태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facebook new building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래서 위 사진과 같이 Facebook도 자신들의 미션에 따라 새로운 공간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사방이 탁 트이고 천장도 매우 높은 공간이다. 그럼 그들의 미션이 뭐길래 탁 트인 공간에서 일하기를 원했을까? 이미 Zuckerberg가 Y Combinator에서 언급해 많이 유명해진 그들의 미션은 사람들을 더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런 미션에 따라 일하는 것이 업무 공간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생각하기 전에 먼저 이 미션에 따라 일한다면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게 될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질문들을 떠올려봤다.

  • 전세계의 사람들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이들은 일을 할때 생각이 어떻게 흐를까?
  • 한 국가에 한정된 서비스를 만드는 사람들의 사고 흐름과 비슷할까?
  • Facebook의 엔지니어들은 엔지니어링 부서 이외에 어떤 팀들과 소통을 얼마나 자주하고 어떤 과정으로 기능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어 설계하고 만들까?
  • 그럼 마케팅팀 직원들은?
  • 디자인팀 직원들은?
  • CEO와 경영진은?
  • 이 몇만명의 직원들이 어떻게 미션과 가치를 서로 공유하고 그에 따라 태스크를 구상할까?

질문을 하면서 답변이 동시에 저절로 나오는 걸 느꼈다. 국가, 종교, 문화, 기후, 언어, 인종 그리고 가치관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연결 시키려면 그에 걸맞는 서비스가 필요할 것이고 그 서비스를 이루기 위한 기능과 디자인이 필요할 것이다.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서비스를 하느냐는 그 회사의 정체성을 나타낼 것이고 그에 따라 팀들 간의 유기적 협업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즉, 일의 목적에 따라 그에 적합한 업무 방식이 필요하게 될텐데 그 방식이 회사 곳곳에 잘 정착되기 위한 문화나 공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서비스를 하는 회사의 업무 공간이 팀별로 지나치게 구분되어 있거나 넓은 회의실이 몇 군데 없고 건물 곳곳에 배치되어 있지 않으면 팀들이 서로 협업하기 어렵지 않을까?

위에서 든 예는 업무 형태에 따라 적합한 공간 형태를 생각하는 순서였지만 반대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자연을 벗삼아 사는 사람과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에 사는 사람의 사고 방식과 흐름이 전혀 다른 것처럼 업무 공간의 형태에 따라 같은 일을 하더라도 사고의 방식과 흐름에서 차이가 생길 것이다. 물론 업무에 적합한 공간에서 일하지 못한다고 해서 생산성이 급격하게 낮아지거나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공간까지 생각하는 것은 생산성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자신들의 미션과 문화에 맞는, 직원들을 한껏 고무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98%에서 99%로 나가기 위함일 것이기 때문이다.

 


 

서론이 참 길었는데 패션테크 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옷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은 날은 집을 나설때부터 다르다. 아침에 하는 생각의 내용도 조금 달라진다. 오늘 있을 일을 생각하고 누굴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까지 생각이 이어진다. 뭘 입을지 생각이 안나 대충 입은 날은 종일 찝찝하다. 옷에도 생각이 반영되지만 어떤 옷을 입느냐도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옷은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옷을 구경하면서 이건 어떨까, 저건 어떨까 생각해보고 입다보면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전에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디자인이나 스타일의 옷을 입어보면 되게 어색하지만 ‘어 뭐지 이런 모습도 있었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직장인이 되고나서 이런 경험을 서너번 했다. 이쯤 되니 사실 패션은 자기이해를 필요로 하는 자기표현인 거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패션은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래서 패션테크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패션을 자기이해의 수단으로 보는 관점이 사회에 얼마나 만연한가가 패션 사업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그 관계성에 대해서 다뤄보고 싶어졌다.

Fashion – 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니?

나는 나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정확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른다. 아직 찾지 못한 부분이 많다. 물론, 아는 범위 안에서는 누구보다 나를 더 잘 안다. 하지만 모르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인생은 어쩌면 자기를 찾고 이해하는 자아성찰의 여행일지 모른다. 마틴 하이데거도 죽기 전까지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The Sartorialist – 사진으로 가득 채워진 이 책은 패션에 대해 그리고 패션이라는 창으로 새로운 나를 보게 해주었다.

 

아마존 베스트셀러 중에 The Sartorialist라는 책이 있다. www.thesartorialist.com 라는 사이트의 도서 버전이다. 이 책은 텍스트가 반도 안된다. 전체가 인물사진이고 모두들 완전히 다른 옷을 입고 있다. 한명 한명 사진을 보면서 ‘내가 저 옷을 입고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라며 계속 나를 대입시켜 보았다. 찌릿찌릿 했다. 어떨때는 부끄럽기도 했고 어떨때는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단순히 멋진 옷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입은 사람의 사진을 보았을 뿐인데 나는 거기서 오히려 나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심지어는 가까운 미래에 어떤 커리어를 쌓으면서 어떤 옷을 입고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옷을 입고 회의에 참석하고, 연단에 올라 발표하고 싶은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너덜하게 막 입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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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이미지

사토리얼리스트에 있는 사진들이다. 요새 너무 formal하지 않은 정장에 관심이 많아서 이런 사진들을 가져왔다. 아.. 저 일본 아저씨들 너무 멋있다. 이 사진들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냥 저런 옷을 입은 외국인에 불과한가? 아니면 ‘내가 저 옷을 입고 출근을 하면 어떤 기분일까’ 라며 자신을 대입시켜 보고 상상해보았는가?

나는 단순히 옷을 입은 사람을 본 것이 아니었다. 패션 도서를 읽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패션이라는 도구를 접함으로써 자기이해의 과정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몇년전의 내가 이 문장을, 이런 생각을 보고 엿듣게 된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 같다. 그런데 한번 관심을 갖게 되니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 분야의 사람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던 나의 모습과 내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가에 대해서도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여행을 떠나 모르던 곳을 탐방하고 새로운 모임에 나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만이 자기성찰의 방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를 알아가는 새로운 루트를 찾은 것이었다. 옷을 통해서 나와 주변 그리고 우리를 감싼 문화 전반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화에 따라, 오늘의 느낌에 따라, 충동에 따라, 만날 사람에 따라, 나갈 모임에 따라, 생각에 따라 옷을 골라 갖춰 입는 것은 그저 옷을 집어 걸치는 행위가 아닌, 충분한 자기이해를 바탕으로 한 자기표현의 행위인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나는 옷을 잘 입는데 그렇게까지 나에 대해 이해하면서 옷을 입지는 않는데?’ 어디까지나 자기이해는 메타인지의 영역이다. 옷을 잘 입는다고 꼭 자기이해가 수반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옷을 잘 입고 싶은 그 이유를 내 안에서 찾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자기이해가 시작된다. 나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고 반응하는지에 대해 알아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옷을 잘 입지 못한다고해서  자기이해가 덜 된 것도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패션은 자기이해와 자기표현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다. 내가 과도가 없다고 사과를 못깎아 먹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과도 없어서 못깎아 먹으면 인생에 대해서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업성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고 나니, 패션테크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사업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패션은 개인의 취향과 생각, 가치관에만 그 영향이 국한되어 있지 않다. 사회와 문화에도 관련이 있고 둘은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는다. 개인이 사회에서 갖는 역할을 중요시하는 문화에서는(성숙한 문화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며 계속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선진국에 작가와 블로그 문화(like WordPress and Medium)가 잘 발달되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경험한 것과 알게된 것에 대해서 서로 공유한다. 도대체 이게 패션의 사업성과 무슨 연관성이 있단 말인가?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 옷은, 패션은 그냥 옷 걸치는 것이 아니다. 개인 문화가 성숙한 사회에서는 개개인이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높고 자신의 취향 또한 분명(확고)해질 수 밖에 없다. 자신이 뭘 원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이해하고 있는 개인들이 매우 다양하게 그리고 많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옷으로 옮겨가면 앞서 이야기했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여지고 싶은지 즉, 어떤 옷을 입어 자신을 나타내고 싶은지로 연결된다. 당연히 이런 곳에서, 이런 개인이 많은 곳에서 다양한 옷이 더 자주, 더 많이 팔리지 않을까? 옷에 정말 개미 코딱지 만큼도 관심없는 사람을 붙잡고 옷이 이래요, 추천이 어째요, 감성이 오져요라며 백날 설명하고 광고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런 개인이 많은 지역 혹은 국가일 수록 더 그럴 것이다. 물론, 아직은 옷에 관심이 없지만 이제 천천히 알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듯 경우의 수는 매우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여러 카테고리에 속한 사람의 수는 많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카테고리들이 주류를 이루는가에 대해 알아내는 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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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illennials – X 세대의 뒤를 잇는 밀레니얼 세대

 

airbnb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Airbnb는 사업이 궤도에 오른 후 시인했다. 자신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밀레니얼 세대였다고. 밀레니얼 세대는 디지털에 익숙하고 자금이 그리 넉넉치 않지만 여행을 떠나기 좋아하며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나가는데에 거리낌이 없는 세대다. 앞서 설명한 내용에 비추어보면 이 세대는 자기이해의 여정을 달가워하고 즐기는 세대인 것이다. 초창기의 Airbnb는, 현재도 그러하지만, 이 세대가 견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의 집에 모르는 사람을 들여 숙박하게 한다? 새로움과 창의성이 샘솟는 실리콘 밸리에서도 Airbnb의 이런 아이디어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업과 아이디어는 돈이 궁핍하지만 전세계로 여행하길 원하는 밀레니얼 세대에 의해 처음으로 환영받았고 지지 받았다. 그렇게 사업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안정화 되어갔다. Airbnb가 이후 어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지금에 이르렀는지는 The Airbnb Story라는 책이 아주 잘 설명해 놓았다.

다시 패션으로 돌아와, 이 Airbnb의 이야기를 패션에 적용해보면, 현재 우리가 시장으로 삼고 있는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필요해진다. 물론 Airbnb는 사업을 시작할때 밀레니얼 세대는 생각조차 안했지만 말이다. 적어도 서비스를 제공할 대상에 대해 알아본다면 사업을 진행하고 전략을 수립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우리가 만들 서비스를 쓸 사람들에 대해 알아보기 위한 질문들을 아래와 같이 생각해보았다.

  •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
  • 자신에 대해 알기를 꺼려하지는 않을까? 그럴 준비는 되었을까?
  • 아직 그 정도로 문화가 성숙하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 2, 3, 4, 50대 각각은 어떤 생활 양식으로 대변될 수 있을까?
  • 지금 그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 앞으로 더 잘 벌 수 있으리라는 분위기가 사회에 만연한가?
  • 이들은 미래를 낙관하는가? 아니면 반대인가? 그에 대한 이유는?
  • 이들은 여행하기를 좋아하는가?
  • 이들이 명품에 대해 또는 어떤 브랜드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고 있을까?
  • 또 그 인상의 강도는 강한가? 혹은 약한가?
  • 강하다면 어느 방향으로 강하고, 그 방향이 우리가 알리려는 방향과 다르다면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 이해시키는데에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그 시간을 우리가 견뎌낼 수 있을까?
  •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바꾸고 이해시키려면 어떤 마케팅과 홍보 전략을 어떤 스텝으로 수립하고 실행해야 할까?

타겟을 이해하고 좁혀 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그 타겟이 속한 사회와 이를 대변하는 개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위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뭘 어떻게 좁힐지 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적어도, 위와 같은 질문 및 이해가 뒷받침 된다면 좀 더 수월하게 사업을 진행하고 여러 전략들도 시장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수립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 이해를 바탕으로 또 다시 아래와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 우리가 제공하려는 패션 서비스의 가치가 무엇인가?
  • 그 가치가 소비자 주류에게 얼마나 다가갈까?
  •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가 성숙한 개인 문화의 부재 때문은 아닐까?
  • 다른 이유가 있다면 개별적인 영향은 얼마나 될까?
  • 현재 소비자 카테고리는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 각각에 대한 상황은?

지금까지 패션이 개인의 자기이해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그 관련성이 패션 서비스를 만드는 관점에서 어떻게 사업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자기이해의 관점에서만 보면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옷을 사고 입으면서, 여행을 하며 새로운 곳에 가보면서,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새로운 언어로 소통하면서 끝없이 자기이해의 과정을 걷는다. 나는 이 각각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아직은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에 의해 이 연결고리들이 군데군데 끊어져있다. 남자가 화장을 하네, 여자가 저런 옷을 입네, 저 사람은 저런데를 가네.. 등 온갖 편견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 편견들이 자취를 감출때, 모든 개인이 각자의 성향과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존중을 받을때 개인들의 활동은 더욱 다양해지고 풍성해질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때 옷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 또한 훨씬 더 다양하고 많이 생길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 우리 서비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돕는 건강한 서비스로서 더 큰 성장을 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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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란 무엇인가

최근에 페이스북을 보다가 예의없는 사람에 대해 쓴 글을 보게 되었는데 간결하고, 관점이 재밌고 무엇보다 무릎을 치게 되는 시원함이 있어 그 글을 공유하고 내 생각을 얹어 글을 조금 확장해보고자 한다. 근래에 정의란 무엇인가(Michael Sandel), 죽음이란 무엇인가(Shelly Kagan), 국가란 무엇인가(유시민) 등 ‘~란 무엇인가’ 류의 책을 많이 읽어 제목을 따라해봤다(..).

아래는 신상철님의 글이다.

https://www.facebook.com/shinestory/posts/1279056888889466

결론은 딱 11자다. 예의 없는 사람은 멍청하다.

27년 밖에 살지 않은 내 인생에서도 별의별 이상한(..) 사람, 예의 없는 사람, 눈에 뻔히 보이게 남을 이용하려는 사람, 상대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사람 등 갖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봐왔다. 내가 직접 겪은 것도 있고 목격한 것도 있다. 글 쓰면서 주마등처럼 그때의 기억들이 스쳐지나가고 있다. 지금 회사 입사 전에 했던 면접도 떠오르고 전 직장 사람들도 떠오른다. 후후.. 열이 오르네. 다 사람구실 하면서 살고는 있으려나 그게 제일 궁금하다.

거두절미 하고, 내심 어떻게 저런 인간들(?)이 세상에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누군가 설명해주길 바랐다. ‘저런 사람들은 이러한 환경적, 문화적, 개인적, 사회적 요인에 의해 그런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갖게 되었으리라~’ 식의 해석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앞으로도 있을 이런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11자라니! 단지 멍청한 거였어?.. 단순히 정신승리적인 통쾌함 뿐만 아니라 간결하고 똑 부러지는 논리가 뒷받침하고 있기에 난 드디어 해석이라 할만한 걸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예의 없는 사람에 대해 논리적 해석을 득하게 된거 한번 더 깊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지능과 정서 개념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단순히 예의 없음은 지적 능력의 결함이 아닌 나쁜 정서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

분류하기 좋아하는 인류는 자연을 분해하고 분석하다가 언제부터인가 스스로를 이해하고자 자신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초기 심리학의 고군분투로 탄생한 것 중 하나가 인지능력과 정서의 분리이다.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정서를 학문의 범주로 끼워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 마음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시도이므로 폄하할 생각도, 폄하할 위치도 아니지만 분리할 수 없는 걸 분리하려고 시도했다고 생각한다. 그 시도의 여파로 정말 우리 마음 어딘가에는 지능과 정서가 따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 많다. 이걸 정말 분리할 수 있을까? 세상과 사람에 대해 좋은 마음 혹은 나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인지능력과 정말 서로 독립적일까?

단순한 예를 들어보자. 주어진 정보를 잘 분석하고, 편재되어 있는 정보들 사이에서 흐름과 패턴을 객관성있게 잘 읽어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사람은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 사람들, 나아가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고 흘러가는지를 마냥 지켜보고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해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상황을 잘 주시하고 있고 또 어느정도 이해도 하고 있다. 반대로 정보들 사이의 관계성과 흐름을 판단하지 못한다면, 다른 말로 인지능력이 부족하다면 전체를 보지 못해 객관성이 떨어지게 된다. 즉, 편견이 여러 부분에서 점점 심해지게 되고 이를 두고 ‘편협’하다고 한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이걸 현실의 예로 치환해보자. 근처의 사람만 봐도 객관성이 두드러지는 사람과 편협한 사람이 각각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이지 않는가? 편견이 심한 사람일 수록 어떤 사람을 대할 때에도 그 차이가 심해진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 비슷하게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대하는데에도 정보 분석이 동반된다. 가령,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어디 출신인가, 말하는 습관이 어떠한가, 어떤 옷을 입는가, 최근 무슨 일을 겪었는가 등등 사람에 따라 누군가를 대하기에 앞서 자신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수 많은 정보 분석과 가치 판단이 선행된다. 그래서 위의 편협한 사람은 객관적 분석 능력이 부족한 것이고 – 한쪽으로 치우쳐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심하고 – 누군가를 대할 때에도 합리적으로 대할 줄을 모르고 – 인지능력이 뒤떨어지는 것이다. 지금 대쉬(-)로 표현한 구절은 논리적으로 거의 동등한 것들이다. 그래서 이를 한마디로 바꿔 말하면, 편협은 인지능력의 결함으로 설명해낼 수 있다.

나 또한 이렇게 설명해놓고 보니 이 이론이 꽤나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신기한걸..?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인지능력의 부조화가 심한 환자들이 편협성이 커지고 사회성이 급격히 후퇴한다는 내용의 책도 떠오른다. 그렇다. 편견이 심한 것은 인지능력이 뒤떨어지거나 의식적으로 정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벌써 많은 정치인들이 떠오르는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다시 지능과 정서의 분리로 돌아와, 따라서 이 둘은 분리할 수도 없고 분리되어 있지도 않다. 다만 분리해서 생각은 해볼 수 있다. 분리하여 심리학적으로 논지를 전개해 나갈 수는 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인간 정신에 대한 설명과 해석의 한가지 관점을 추가시킨 것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를 상철님의 글처럼 실생활에 적용해보면, 예의가 실종된 사람, 자신보다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 지적으로 약해보이는 사람을 얕잡아보는 사람, 나아가 무시하는 사람, 함부로 대하고 하대하는 사람, 이용하려는 사람, 속이려는 사람 등 이 모든 카테고리의 사람들(인간들이라 하고 싶다)은 결론적으로 멍청하거나 알고는 있지만 연유야 어찌 되었든 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두가지 경우 모두 씁쓸하다..

그런데 여기서 혹자는 정말 철저하게 남을 속이고 이용하는 사람이 어쨌든 이득을 많이 보고 잘 살게 될 가능성이 크니까 더 똑똑한거 아니냐고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 남을 쉽게 무시하고 할 말 못할 말 다 내뱉고 사는 사람이 마음 후련하게 사는 것이니 정신적으로도 더 편한 삶을 사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시야가 좁은 것이고 편협한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맞을 수 있지만 결국 멀리 보면 그 방식은 실패한다. 행복한 삶도 아니다. 이제까지의 역사가 보여주듯 그런 사람들의 거의 전부는 말로가 좋지 못하다. 멍청하다는 거다. 멀리 보는 것도 지적 능력이다. 멍청하든 의도적으로 그렇게 살든 이래나 저래나 피곤한 삶이고 사랑받는 삶도 아니다.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방식이다..

위의 경우들을 수도 없이 본 선대의 사람들이 이것을 대상화시킨 개념이 바로 도덕과 윤리이다. 이 개념들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도덕이란 개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찾아보면 상당 부분 이런 내용이다. ‘그냥 사람 좋게 사는게 좋은거지 암~’ 이러고 나온 개념이 아니란 거다. 그래서 타고난다고 생각했던 이 인성 혹은 도덕성을 ‘교육’하는 것이다. 마음의 태도와 인성 모두 지적 능력이라는 말이다. 좋은 마음과 예의 바름이 인생의 마지막까지 미칠 영향을 수도 없이 보고 집대성한 이 윤리를 그렇게 주변에서 보고 듣고 학교에서, 가정에서 교육받았음에도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해 예의없이 행동하고 쉽게 남을 얕잡아보는 것은 멍청하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Edward Wilson의 On Human Nature와 Richard Dawkins의 The Selfish Gene이라는 책을 보면 동물 세계에서도 ‘처음엔 남에게 좋게 대하기, 나에게 잘해주면 그 상대에게 잘 대하기, 나에게 해를 끼치면 무시하거나 되갚아주기’라는 소위 호혜주의 혹은 Tit for tat 전략이 가장 장래있는 생존 전략이다. 이 전략을 따르지 않은 개체 혹은 종은 종족 번식에 어려움을 겪는다. 심지어 이 호혜주의가 유전적 형질로 생기게 되었다는 이론도 있다. 동물도 안다는 거다 예의가 가져올 좋은 영향을. 이쯤되면 예의 없는 사람은 편협하고 지적능력이 떨어질 뿐더러 동물만도 못한 사람이 된다(…). 그렇다고 미안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예의 없는 사람을 보면 어떡하란 말인가? 상철님의 말씀대로 무시하면 된다. 설득할 수도 없고, 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교화시킬 수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거기에 들일 시간과 노력, 에너지가 너무 아깝다. 그래서 정중히(?) 무시하고 할 일을 묵묵히 하면 된다.

이제 마무리지을 때가 왔다. 주변에 쉽게 고함지르고, 무시하고, 남을 얕잡아보는 사람이 있는가? 멍청한 거니까 무시하면 된다. 물론 ‘예의있고 나이스’하게 무시해야 한다. 그래야 지적이니까. 이제 예의없는 사람을 깨끗이 무시할 이론적 토대가 구색을 갖추었으니 실컷 무시하고 다니자. 아 정리가 잘 된 느낌이다!

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걸까?

요새 김정운 작가의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읽고 있는데 단락이 중요하게 다가와서 읽다말고 전부터 생각하던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항상 고민이 된다. 지금 내가 진짜 원해서 이러고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타율성이 한톨이라도 섞여 남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맞추기 위해 이러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때가 있다. 적어도 우린 사회에 살고 있으니 타인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은 그렇다 치지만 내가 원한다고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은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이 원했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엔 그렇게 무서울 없었다. 그래서 병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자주 갖고 메타인지를 발휘해보려 발버둥친다. 그러다 읽던 책에서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문장이 나와 관심이 가지 않을 없었다.

아래가 단락이다.

월급쟁이 생활을 때려치우기만 하면 바로 내 삶의 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착각이다. 평생 추구해야 할 공부의 목표가 없음을 돈의 문제로 환원시키며 자신의 쫓기는 삶을 정당화하는 것 또한 참으로 비겁하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을 관심의 대상과 목표가 있어야 주체적 삶이다. 우리가 젊어서 했던 ‘남의 돈 따먹기 위한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다.

– 김정운의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중에서 –

약 7년전, 처음 철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 다행히 내가 처음 그렸던 평생동안 할 공부의 밑그림은 나의 죽음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보통 앞으로 무얼 하며 살아야할지 고민한다거나 1년 혹은 길어야 3년짜리 계획을 세울때의 기준은 ‘지금’이다. 그래서 하고자 했던 일이 끝나고 세운 계획의 막바지에 이르면 항상 다음의 목표는 상실된다. 그때가서 또 다음에 무얼할지 생각하게 된다. 세운 계획은 딱 그 기간만큼을 상정해놓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10년짜리 혹은 더 긴 계획을 세워도 그 기간이 끝나면 다음에 무얼할지 모르는 것은 매한가지다.

고맙고 재밌는 것은, 철학적 사유는 내가 계획을 만들거나 계획을 만드는 행위를 하기 전에 그것에 대해서 추상적 사고를 하게 만들어준다. 다른 말로는 메타인지를 갖게 해준다. 그래서 그 계획이 왜 내게 필요하고, 그게 내 인생과 정체성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이 끝났을 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다음엔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서 파악하게끔 만든다. 이렇게 ‘지금’의 기준말고 보다 ‘전체’의 기준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다보면 한가지 사실에 다가가게 된다. 그것은 인생에 관한 모든 계획은(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죽음을 기준으로 세워져야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까? 앞서 말했듯이 지금을 기준으로 계획을 세우면 그것이 달성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다음의 것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그거 안세우면 ‘방황’ 혹은 ‘휴식’이다. 그런데 죽음의 순간에 내가 어떤 존재로 기억되고 싶은지,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지, 가족과 친구,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궁극적으로 어떤 종류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싶은지 등, 마지막 상(image)에 대해 정의를 해놓으면 폭포수처럼 거꾸로 거슬러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해놓으면 하나의 계획 혹은 목표를 달성했을 때 다음 목표를 걱정하거나 세우기 위해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

위에서 언급한 것을 예로 들면, 가족과 친구,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정의하는 것은 나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 정의하는 것이다. 그 ‘어떤’이 되기 위해 오늘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해야할지 벌써 대충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이것을 바탕으로 짧고 긴 ‘인간적 면모에 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이 계획들의 중간중간에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는 것이 포함될 수도 있고 오늘 당장 친구에게 어떻게 대하고 어떤 감정과 마음을 전달할지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해볼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세상에 작더라도 어떤 기여를 한 사람으로 남고싶은지에 대해 정의한다면 그것은 아마 나의 커리어에 관해 정의하는 일일 것이다. 나의 경우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정의)은 ‘대단하진 않더라도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거나 기존에 불편했던 것들을 편리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던 사람으로 남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인생 전체에 걸친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으로서 프로그래밍이라는 것을 택했다. 이걸 세운 것이 2013년이고 3년 반이 지난 지금도 이걸 재밌고 제대로 해보기 위해서 혼자 공부하거나 프로젝트 팀을 만들거나 퇴사하고 새 회사로 옮기는 등 여러 방면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금껏 열몇개의 계획들이 있었지만 한번도 방황하게 된 경우는 없었다. 물론 인생 굴곡의 높낮이, 즉 원하는 것을 얻고 못얻고의 차이는 존재했지만 그 방향성 자체에는 틀어짐이 없었다.

이처럼 인생을 살고, 이에 대해 계획하는 것의 본질에는 마지막에 대해 정의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이 죽음을 기준으로 한 마지막 상은 추상적이어야 하고 추상적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00억 정도의 재산을 가진 부자로 살다가고 싶다라고 마지막을 정의하면 필연적으로 그걸 계획한 현재에는 그 수치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 부서지기도 쉽다. 가령, 지금 스무살인데 70년뒤쯤 죽을 것 같으니 200억을 그 나이에 맞춰 나눠 계산하면 현재 얼마를 벌어야하는지에 대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타산에 맞지 않으면 불가피하게 계획을 수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삶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므로 자신이 70년뒤에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길이 없어 계획은 무너지기 쉽다. 그러나 추상적으로 세운다면 그 계획은 그걸 이루기 위한 수 많은 구체적인 하위 계획으로 구성될 수 있고, 중간중간 어떤 일이 일어나는 등의 이변이 생기더라도 쉽게 유기적으로 하위 계획들을 조정해 마지막 추상적인 계획을 유지할 수 있다.

다시 맨 위의 김정운 작가의 글로 돌아와, 이 부분을 읽으며 위의 생각들이 떠올랐다. 마지막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은 현재에 함몰되어 살기 때문에 현재 자신의 삶이 이렇게 된데에 대한 원인 파악을 하기 어렵고 더 나은 상태로 도약하기 위한 next move를 꾀하기도 어렵다. 비유하자면 근시안적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시야를 갖고 있기에 현실에서 도피해도 주체적 삶을 살기가 어렵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을 관심의 대상과 목표가 있어야 주체적 삶이라는 대목은 그래서 매우 공감하는 바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공부가 근시안적인 목표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닌, 마지막 상에 정의된 공부와 일치할 때, 내가 지금 다른 이들을 생각하고 대하는 방식이 매 순간의 감정과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닌, 마지막 상에 정의된 내가 원하는 나의 인간적인 면모와 궤를 같이 할 때 비로소 그것이 진짜 주체적 삶일 것이고 evanescent한 우리네 삶이 끝날 때 마지막 날숨을 내뱉으며 ‘좋은 삶이었다’라고 말하며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Jeff Bezos, founder of Amazon 그리고 삶

이 글은 조성문님의 아마존(Amazon) 성공의 비결은 소비자 경험 개선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 포스팅에 영향을 받아 작성 했으며 발췌한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출처를 시작 부분에서 밝히는 이유는 제 글만 읽어도 괜찮지만 이 글을 먼저 읽고 제 글을 읽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올해 47세의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 2010년에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에서 졸업생을 대상으로 연설을 했다. 6분 25초 지점부터 그의 연설이 시작된다. 10살 때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해서 “It’s harder to be kind than clever (똑똑한 것보다 친절한 것이 더 어렵다)는 원칙을 배우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계기로 뉴욕의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마존을 창업하게 되었는지, 어떤 기분으로 어려운 선택을 내렸는지 등을 설명한다. 연설 중 마지막 대목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와이프에게 아이디어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당시 내가 존경하던 상사에게 가서 이야기했습니다. 인터넷으로 책을 팔고 싶다구요. 센트럴 파크를 한참 걸으면서 주의 깊게 이야기를 듣던 그가 말했습니다. “That sounds like a really good idea, but would be even BETTER idea for someone who already didn’t have a good job. (그거 참 멋진 아이디어군, 근데 이미 좋은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더 좋은 아이디어일텐데..)” 그리고 48시간동안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것은 싫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열정을 따르기 위해 가장 안전하지 않은 선택을 한 셈이지만, 저는 그 선택이 자랑스럽습니다. (중략) 시간이 지나 당신이 80세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조용한 방에 혼자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혼자 이야기해본다고 생각해보세요. 가장 간결하고 의미있는 이야기는, 결국 당신이 했던 선택들을 나열하는 것일겁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한 선택 그 자체입니다 (In the end, we are our choices).

자기 자신에게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행운을 빕니다. (Build yourself a great story. Thank you, and good luck.)

가장 인상적인, 가장 뇌에 충격을 준 부분을 파란색으로 표시했다.

살면서 겪어온 경험들과 공부해온 지식은 내게 ‘인간이란 그리 단순하지 않은 존재’ 라고 알려주었다. 이 글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정작 생의 말미에 가면 우린 우리가 한 선택들의 단순한 나열 혹은 그 집합 자체라니. 단순한 배열 조차 거대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경험과 행동, 생각, 선택들은 단순한 데이터의 집합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데 개개인의 사연을, 인생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엔 크고 작은 의미가 깃들어 있다. 그곳에 모든 희로애락이 있다. 그만큼 인간은 고유한 존재다.

Bezos에게 Amazon은 그의 선택들의 나열이 만든 가장 큰 결과물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Amazon이 있기 전, 그는 선택들의 나열이 중대한 방향 전환을 맞게 할 중요한 선택 하나를 했다. 자신의 마음을, 열정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에게 의미있는 선택을 했다. 남들이, 사회가 말하는 ‘risk’에 귀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살아있게 할 선택을 했다.

이런 멋진 이야기들을 여럿 접하면서 내게 요상한 이분법적인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무미건조한 인생 그리고 흥미로운 인생, 둘 중 어떤 인생을 택할 것인가?”

어떤 인생을 살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있다. 훗날, 선택에 방해가 되는 여러 문제들이나 상황에 핑계를 대가며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었다고 한숨섞인 말을 하기엔 단 한번의 인생은 너무나 소중하다. 그리고 시간은 자비없이 흐른다. 마음을 따르지 않은 선택을 하고 시간이 흐르면 그 뒤엔 후회만 남을 뿐이다. 즉, 냉철한 시간 앞에 나의 선택과 그 과정에서 나오는 결과만이 있을 뿐이다. 그 결과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을지 없을지는 그 선택의 동기가 내부의 것인지(마음을 따랐는지) 혹은 외부의 것인지(타인, 사회의 훈수를 따랐는지)에 따라 결정될 터. 결국 인생을 바꾸고자 한다면 그 유일한 수단은 자신의 마음과 선택이다. 매일매일 어떤 선택을 얼마나 신중을 기해야 하는지 혹은 대충 하는지 뒤돌아 본다면 어느 정도 자신의 미래를 점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위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다시 물어본다. “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힘들겠지만 후자를 택할 것이다. 단순히 wording만 보자면 혹자는 “아니 무슨 누군들 흥미로운 삶을 살고 싶지 않겠나?” 라고 물을 수 있지만 이면엔 사실 무서우리만치 냉정한 현실과 시간이 존재하고 있다. 진짜 흥미로운 인생을 택하지 않는다면, 대충 결정지은 선택들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다면 삶의 끝으로 가면 갈 수록.. 단조로움만이 자리할 것이다. 물론 그런 삶이 꼭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럼 흥미로운 삶을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엔 딱히 방법이랄 만한 것이 없다고 본다. 질문이 단순한 만큼 답변도 단순하다. 그저 나 자신이 긍정적이고 흥미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딱히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되길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방법이라면 방법이다. 멋진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선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새로운 상상을 하고, 새로운 일을 하고, 새로운 도전을 해야한다. 이렇게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 모든 과정을 즐겨야 한다. 이때 변해가는 나 자신도 사랑해야 한다(나는 요새 어떤 새로운 생각을, 상상을, 도전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려는지에 대해선 다른 글을 통해 다루려고 한다!).

Bezos의 일화와 연설을 본 뒤 Jobs의 말이 뒤섞이며 머릿속에 한 문장이 떠올랐다.

새로운 경험과 일에 대한 선택들(dots)이 모여 Story를 만들고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관련없어 보이는 선택의 배열이 우리의 인생을 점점 더 흥미로운 인생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